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러스 뉴턴 알렌 (문단 편집) === [[러일전쟁]] 이후 행보 ===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아관파천|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이후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러시아 제국|러시아]]와 [[일본 제국|일본]]의 대결로 압축되었으며, 알렌은 1897년 주한 미국 대리공사 겸 총영사를 거쳐 1901년에는 주한 미국 전권공사가 되어 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 정부]]와 알렌의 생각이 달랐다. 미국 정부의 대한정책(對韓政策) 기조는 불간섭정책이었다. 이는 [[대한제국|한국]]을 포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점차 친일정책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즉 [[일본 제국|일본]]이 미국을 대신하여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그 보상으로 [[한반도]]를 넘겨주고 [[아시아]]에서 우월권을 인정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알렌은 주한 미국의 공사로서 이러한 친일 정책은 현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며 1903년 9월 [[미국]]으로 들어가 당시 [[미국 대통령|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알렌은 러시아가 [[만주]]를 평정하고 막대한 자본을 들여 [[항구]]와 [[철도]], [[도로]] 등을 건설했기 때문에 절대로 만주에서 철병하지 않을 것이며, 항구․철도․도로의 건설로 엄청난 상업시장이 발생했고 그 개방을 약속한 만큼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친러반일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알렌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알렌은 이에 불복하여 미국에 머무는 동안 언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고 정부를 비판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도 [[미국]]이 [[일본 제국|일본]]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대한제국|한국]]에서 [[주한미국공사관|미국공사관]] 철수를 결정한 미국 정부는 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알렌을 해임했다. 1905년 6월 알렌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알렌은 다시 [[의사]]로서 활동하고 집필에도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c/main.do?levelId=kc_n402300|국사 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하지만 알렌은, 비록 [[미국]]의 친일 기조 정책은 반대했어도 [[고종(대한제국)|고종]]에 대한 비판은 점점 심해졌다. 1902년([[광무]] 6년) [[평양부]]를 [[수도(행정구역)#s-7.1|제 2의 수도]]로 만들기 위하여 [[풍경궁|풍경궁(豐慶宮)]] 공사를 강행했는데 공사비 1000만 냥중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내놓은 것은 150만 냥 뿐이었고 나머지 비용은 [[평안도|서북 지방]]에서 [[세금]]을 걷어 충당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은 [[여흥 민씨|민씨]] 척족과 [[탐관오리]]들의 뱃속으로 들아갔고, 세금의 고작 5분의 1만 공사비로 투입되었다. 더군다나 당시 [[평안도]]에는 흉년이 들었고 [[의정부]]의정 이근명이 공사현장을 보며 고종에게 “병정들이 소와 말을 빼앗고 재물을 노략질하며 부녀자들을 겁박하고 있다. 잡세가 번다해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이나 된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고종은 이렇게 답했다. “여전히 그렇다고? 그중에는 반드시 올바른 세금(正稅·정세)도 있을 것이다.”라 했지만 이근명은 (잡세는 예전에 다 폐지 하라고 하교 하셨다.) 지금 세금중에 균역세(均役稅) 빼고 다 잡세인데요? 라며 반문 했으나 사뿐히 씹고 풍경궁 공사 관리들을 포상했다. [*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012010_001|1903년 12월 10일 《[[고종실록]]》 기사.]]] [[풍경궁]]을 짓는 와중에 [[덕수궁 중화전]]도 완공했다. 당시 [[경기도]]의 백성들은 [[인조]]의 능 [[장릉(파주)|장릉]]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배를 채우고 있었다. 보다 못한 고종이 [[내탕금]] 50만 냥을 풀어서 구제하라고 했으나 궁궐짓는 것은 끝내 그만두지 않았다. 저렇게 혈세를 들인 [[풍경궁]] 공사는 [[러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중단되었고 끝내 미완의 궁궐로 남고 말았다.[* 지어놓은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자혜의원으로 재활용되었다. [[6.25 전쟁]] 때 불탔고 현재 그 자리에는 [[평양의학대학]]이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자신의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稱慶禮式)으로 나라예산의 3분의 1을 흥청망청 쓰려고 하자 재정을 아껴 쓰라고 권고했으나 소용없었다. 또한 고종이 [[일본 제국|일본]]에서 30년이 지난 [[양무호|폐급 석탄운송선]]을 프랑스식 고급 가구로 내부를 치장하는 조건에 칭경식때 외국 공사들 앞에서 예포를 쓰려는 목적으로 군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국고로 구매하고, [[가마]]를 타는건 폼이 안나서 [[캐딜락]]을 구매했으며 조선에는 운전수를 구할 수 없어 일본인 운전자를 고용하기까지 했다. 거기다 각국 사절을 걷게 할 수 없어 [[인력거]] 100대를 일본에서 수입했으며 잔치가 끝나면 공짜로 나눠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돌림병이 돌아 연회는 취소되었다. 이렇게 고종이 자신의 사치와 위신을 높이는 데에 엄청난 거금을 들이는 동안 재정은 파탄났고, 관리들은 월급을 지급받지 못했다. 알렌은 1904년 경에는 완전히 마음 속으로 고종을 손절하고 그를 이렇게 여기고 있었다. >'이 나라의 거대한 해충이 되어있고, 저주의 대상이 되어있다. ... [[로마 제국]]이 불타고 있는 동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던 [[네로]] 황제처럼 무희들과 노닥거리고 있다.' 라며 네로급 [[암군]]으로 혹평했다. 돌아가면서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507080701|'''"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한국 황제같은 인종은 처음 봤다."''']]며 무지막지하게 비판했다. 사실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당시 모습은 [[팩트폭력|저런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이었다]]. [[러일전쟁]]이 터져서 나라가 백척 간두에 서있는데 무당들을 불러 궁궐에 포탄이 떨어지지 않게 솥뚜껑을 땅속에 묻고, 푸닥거리를 하며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승리를 기원하며 승리를 의심치 않는 등 주술에 신경을 썼다. 또한 지은 지 2 ~ 7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던 [[덕수궁|덕수궁 주요부]]가 하필 그 무렵에 화재로 불타자 고종은 다음날 바로 측량가, 지관, 건축가를 불러 재건하라고 명령했다. 국외 상황과 국가 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궁궐 짓는 데에 몰두했던 것이다.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화재 발발 며칠 뒤에 [[이하영(1858)|이하영]] 대신이 말하기를, 황제가 "궁궐을 다시 짓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벨 것"이라는 결단을 천명했으며 다른 조카[* 실제로는 사촌동생.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아들이다.] [[완순군|이재완(李載完)]]이 고종에게 다시 짓는 것보다 일단 [[창덕궁]]로 옮기자고 제안했는데 고종은 몹시 격노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으로 “내가 죽거든 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 화를 냈다고 한다. 이렇게 계속 지은 덕수궁 건물들은 고종의 명으로 경복궁 전각을 훼손하면서 자재를 재활용하고 1910년 합일합방 후에 완공한다. [[순종(대한제국)|순종]]도 고종 이상으로 낮게 평가했는데, 알렌의 일기에서는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순종이 지능이 낮았다는 것은 알렌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조선에서 널리 퍼져있는 소문이었다. 순종의 지능은 알 수 없으나, 고종이 퇴위 전에도 순종은 서른이 넘었으나 어떠한 정치적 의견이나 입지도 없었고 아무도 순종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튼 알렌은 이렇게 말년의 고종이나 순종에 실망했기 때문에 조선의 망국이 확실시된 후에는 더 이상 크게 관여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와 여생을 살았다.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의사로 살다가 1932년 12월 11일에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으로는 아내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과 1남 1녀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